google-site-verification: google419692fb0ee168ae.html 외세의 침략과 개항
▶세도정치와 조선의 상황:
세도 정치와 관련된 조선의 상황은 19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의 정치적 혼란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세도 정치란 특정 가문, 특히 안동 김 씨와 풍양 조 씨가 권력을 독점하면서 정치적 부패와 혼란을 야기한 시기를 말합니다. 이들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대신 정치를 통해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의 불만이 쌓였고, 민중의 저항이 잇따랐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세도 정치의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1863년 왕위에 오르면서 정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의 주요 개혁 중 하나는 대전회통 편찬과 같은 법제 정비 작업이었습니다. 또한, 불교 세력을 억제하고, 서원 정리를 통해 사림 세력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세금 제도의 개혁과 군제 개혁을 통해 중앙 집권적 체제를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개혁들은 일시적으로 조선 사회의 안정을 가져왔으나, 외세의 압박과 내부의 반발로 인해 한계가 있었습니다.
능력 있는 관리 뽑음. 서원철폐. 양반에게도 세금 걷음)을 실시하여 백성에게 호응을 얻음. 경복궁을 중건해 원망을 듣기도 함.(당백전 발행으로 물가가 크게 오름)
▶외세의 침입:
▶병인양요(1866):
병인양요는 프랑스의 침략으로 발생했습니다. 배경에는 조선 내에서의 가 있었고,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조선을 공격했습니다. 조선은 강화도에서 프랑스 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결과적으로 불평등한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이 외세의 압박에 처해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신미양요(1871):
신미양요는 미국의 군함이 강화도로 침입한 사건으로, 조선은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조선이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미국의 군사적 힘을 경험하면서 조선은 외교적 대응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통상금지 정책:
흥선대원군은 외세의 침입에 대해 강력한 저항 의지를 보였으며, 통상금지 정책을 통해 외세의 간섭을 최소화하려 했습니다. 그는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를 유지하려 했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통해 외세의 위협이 커지자, 이러한 정책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척화비:
척화비는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세워졌습니다. 이 비석은 "외세와의 통상 금지"를 주장하며,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저항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척화비는 1871년 신미양요 이후에 건립되었으며, 당시 정부의 외세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명하는 중요한 사료로 남아 있습니다.
건립 과정: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의 통치 하에 세워졌으며, 그는 외세의 압박에 대해 강력한 저항 의지를 보였습니다. 비석의 내용은 외세와의 통상 금지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척화(斥和)" 즉, 평화적 외교보다는 외세에 대한 저항을 선택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비석은 조선 사회에서 외세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사건들과 정책들은 조선 후기의 외교적 상황과 정치적 혼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학생들은 이 사료들을 통해 조선의 외교 정책의 변화를 분석하고, 외세의 침입에 대한 사회적 반응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은 조선의 외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조선의 개항:
▶운요호 사건 (1875):
운요호 사건은 1875년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앞바다에 침입한 사건입니다. 일본은 조선과의 통상 관계를 맺기 위해 무력으로 압박하려 했습니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 외교적, 군사적 강화를 통한 아시아 진출 의도가 있었습니다.
사료적 근거: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과의 통상 관계를 원했지만, 조선은 여전히 통상금지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운요호 사건은 이러한 조선의 외교적 고립을 타개하려는 일본의 시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무력 사용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며, 조선을 향한 외교적 압박을 강화했습니다.
▶강화도 조약 (1876):
운요호 사건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조약 체결을 강하게 요구하게 되었고, 결국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일본과 조선 간의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조선의 외교적 지위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조약의 주요 내용:
통상항 개방: 조선은 일본에 대해 부산, 인천, 원산의 3곳을 통상항으로 개방해야 했습니다.
불평등 조약: 조선은 일본에 대해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외교적 자주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영사 재판권: 일본은 조선 내에서 일본인에 대한 재판권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조선의 법적 주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사료적 근거: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외세의 압박에 굴복한 결과로, 조선의 외교적 고립을 종식시키고 일본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이후 다른 서구 열강과의 조약 체결로 이어졌으며, 조선의 근대화와 외세의 간섭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결론: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은 조선의 외교적 지위와 자주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이 외세에 의해 강제로 통상 관계를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일본을 포함한 다양한 외세의 간섭이 심화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참조자료 1:한솔 플라톤 역사하기.
참조 2:전한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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